서재필과 독립신문 바로보기
<새로쓰는 한국언론사> 제3장의 저자인 김유원 교수는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서재필이 세계 신문사(史)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2개어 신문을 발행하여 한국언론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고 말했으며, 서재필이 도미하면서 국가재산 24,400원을 가져갔다는 비판까지도, 그 돈을 개인용도로 쓴 것이 아니라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서 쏟아넣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러한 비판을 '당치 않는 비난'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반면 한겨레 손석춘 기자는 자신의 저서인 <신문 읽기의 혁명>에서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대한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의 근대화 과정이 자주적이지 못한 채 미국과 일본의 힘을 빌린 것을 한계로 지적하고 있다. 또한 독립신문이 당시 의병들을 '비도'로 규정한 것에 대해 이는 이후 조선일보가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게 된 근거를 만들어 준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서재필에 대한 논쟁이 가열화 된 것은 지난 1996년 4월 7일 신문의 날이자 독립신문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특집·연재기사를 대폭적으로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일보는 96년 2월 26일부터 7월 2일까지 무려 13회에 걸쳐 '풍운의 세계인 서재필'이라는 연재기사를 다루었다.(이 연재기사의 대부분은 최근 홍세화씨까지 고소하겠다고 개난리를 치고 있는 이한우 기자가 썼다.) 조선일보는 이 연재기사에서 서재필을 '한국의 볼테르', '언론의 아버지', '최초의 근대인'이라는 쓸 수 있는 용어는 모두 써 가면서 서재필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한국언론사의 관점에서 서재필의 공로는 분명히 있다. 우선 최초의 한글전용신문으로 대중지로서의 입지를 강화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공로이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그 실패의 원인에 대해 '무엇보다도 제일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민중의 무지몰각 때문이었다'고 비난하였다.(조선일보 1996년 3월 10일자) 갑신정변의 실패가 일본의 '정한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개화파의 정세분석의 오류였다는 관점이 주류 학계내에서도 지배적인 것임에 비추어볼 때 그러한 발언은 '책임회피'적인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어쨌든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계기로 대중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곧 이것이 '독립신문'의 계몽적 논조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치하 당시 그가 미국에 거주하면서 벌인 '독립운동' 또한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그러나 서재필의 행적은 영웅시되어서는 안된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만들 당시 그는 우리말을 쓸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미국인 '제이슨 필립'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더욱 정확할 듯 하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그는 미국으로 돌아갈 때 당시 외국인 공무원이 해임당할 때 지급받던 잔여계약금 24,400원을 고스란히 받아서 돌아갔다. 당시 국가재정이 어려워 국채보상운동까지 벌어졌던 것을 상기했을 때 이 돈을 고스란히 미국으로 가져가서 자신의 사업자금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그를 '근대화의 아버지'나 '독립운동가'로 미화하는 것이 과장된 것임을 나타낸다. 또한 김유원 교수나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것처럼 서재필이 사재를 모두 털어 독립운동 자금에 썼다는 사실은 별다른 근거가 없는 것이다. 주진오 교수에 따르면, 그는 독립운동 활동을 그만둔 1922년 이후에도 '제이슨 상회'를 비롯한 여러개의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한겨레신문 96. 4. 30)
독립신문의 행보 역시 미화되어 왜곡된 부분이 많다. 독립신문은 당시 대외적으로 '자주국권'을 표방하면서도 친일적 기사를 여러번 실었다. 김유원 교수는 이 책에서 아관파천 이후 독립신문이 러시아와 일본에 대해 비난의 강도를 높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내가 찾아본 아관파천 이후 발행된 독립신문에는 아래와 같은 웃기지도 않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일본왕의 하루
(일황 폐하 동작) 일본 신문에 일본 황제의 날마다 하시는 일을 기재하였는데 말하였으되
일황폐하가 아침 오전 6시에 기침하시더니 근일에 와서는 5시에 일어나셔서 한시간
동안은 화원으로 다니며 운동하시고 그 동안에 일본 노래를 5∼6수 지으시고 6시에는
사당에 다니시고 조반 후에는 각처 신문과 공사를 보시고 그 다음에는 독일 책을
가장 주의하여 보시고 그 다음에는 각부 대신의 상주 내용을 보시고 오후 5시쯤 말타고
운동하시고 6시에는 사당에 다니시고 저녁 후에는 신문이나 책이나 읽으시고 10시나
혹 12시에 취침하신다더라.(국민일보 독립신문 웹사이트에서 재인용, 1898년 9월 15일 제139호)
또한 독립신문은 당시 일본의 강탈에 맞서 떨쳐 일어선 의병과 지방관리의 부정부패에 맞선 동학교도들의 항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조로 친일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비난하였다.
"흥해서 비도 1백명을 처부수었는데, 총맞아 죽은 놈이 10여명이요, 충주 월악산에서 총에 맞아 죽은 비도가 7명이요, 층암절벽 숲 속에 떨어져 죽은 자가 부지기수라, 7월 19일 도지휘관 김재은씨가 군부에 보고를 하였는데, 이달 20일 중대장 조관현씨의 보고를 보니, 군부대신 명령에 제천 비도괴수 류인석을 생금한 자 있으면, 당오전 만냥을 상을 주고 그의 큰 괴수도 잡으면 상을 주겠다고 각처에 방을 부쳤다고 하였더라."(김삼웅, 한겨레신문 1996년 4월 10일자에서 재인용)
최시형 체포 큰 다행
동학의 거물 괴수 최법헌(*최시형을 일컫는 듯함)을 잡아 왔다는 말은 이미 기재하였거니와
다시 들은즉 음력 윤3월 4일 경무청 총순 박윤수씨와 권림 순검 송경린씨와 순검
이성근 김효원 2명과 청사 유홍범 등 2명이 떠나서 충청도 강원도 등지로 고생하고
다니며 살피다가 음력 4월 6일에 강원도 원주군 호매곡면 송곡에서 동학 괴수 최시형을
잡은 외에 또 그 제자 송일희와 황만기를 잡아 경무청으로 올려왔는데 그놈들의 무리가
또 몇 천명이 되는지 모른다더라. 당초에 동학 난리를 일으켜 전국을 소동케 하던
괴수를 이제 다행히 잡았으니 전국 인민은 이 경무관리들을 대하여 크게 치사하더라.(국민일보 독립신문
웹사이트에서 재인용, 1898년
6월 11일 제67호)
이러한 기록들에서 서재필과 독립신문의 행적에 대한 미화는 지나치게 왜곡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대해 일방적인 찬양과 미화로 일관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또 왜 유독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만 그러한 것일까?
얼마전 강준만 교수에 대한 '명에훼손 소송'으로 입에 오르내렸던 외국어대 교수인 정진석은 조선일보 1996년 3월 5일자 특별기고에서 '독립신문의 의식 계몽운동과 정책비판을 조선일보가 계승하였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독립신문의 계몽사상과 비판정신은 그 후에 발간되는 여러 민간신문의 귀감이 되어 한국 언론의 전통으로 정착되었다. 한말과 일제치하의 침략에 대한 저항, 광복후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게 되는 연원은 바로 독립신문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현존 한국신문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조선일보는 이러한 전통을 솔선하여 계승 발전시키고 수호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민족진영의 지도자로 추앙 받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 1924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여「혁신 조선일보」로 개편한 후 조선일보는 미국에 거주하는 서재필에게 청탁하여 그의 기고문을 여러 차례 실었다. 서재필과 이상재는 독립협회를 함께 이끈 동지였다.……
조선일보의 76년 역사는 독립신문으로부터 시작된 국민계몽, 항일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고, 근년에는 빠른 정보의 전달, 여론의 선도와 함께 환경보호와 정보화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언론의 기능도 달라지고 있다.「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최근의 조선일보 캠페인은 멀리 1세기 전에 서재필 선생이 독립신문을 통해서 외쳤던 실용적 교육운동의 정신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조선일보 1996년 3월 5일자)
정말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추악하다. 이 정도면 추악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하다. 정진석은 강준만 교수도 인정한 '한국언론학'의 선구자이다. 그 정진석이 일제시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 만행'을 모를리 없다. 그럼에도 정진석은 이를 눈감은채 '구한말 독립신문의 일제치하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일제시대 조선일보에까지 이어졌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이중적으로 늘어놓으면서 '조선일보'라는 언론권력을 방패삼아 곡필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정답이 있다. 조선일보는 서재필과 독립신문의 행적을 왜곡, 과대포장하여 그것을 자사 창간배경과 결부시킴으로서 일제시대 자신의 '친일 만행'을 왜곡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일보의 '파트너'였던 동아일보 역시 그러한 의도에서 미화작업에 '분연히'(?) 나섰던 것이다.
서재필과 독립신문의 공과 실은 분명히 가려어야 한다. 서재필과 독립신문 자체에 대한 비판은, 어찌어찌하여 좋게 보면 '역사적 진보단계에서의 부르주아계급의 한계'로까지 용서될 수 있을만한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을 숨기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반동적이었던 자사의 역사적 사실을 숨기는 선전도구로 써먹는 것은 정말 역사 앞에 커다란 죄를 짓는 것에 다름 아니다.
● 참고자료
강희철, "서재필 평가 부풀어 있다", 한겨레신문 1996년
4월 30일
국민일보 독립신문기사 웹서비스, 국민일보, http://www.kukminilbo.co.kr/inde/inde_news.html
김삼웅, 친일·어용 언론 이제라도 참회를, 한겨레신문 1996년 4월 10일
손석춘, 신문 읽기의 혁명, 개마고원, 1997
유일상·김유원, 새로 쓰는 한국언론사 2∼3장, 아침, 1993
이동현, 개화파 / 그들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1995년 1월 23일
이한우·정진석, 풍운의 세계인 서재필, 조선일보, 1996년 2월 26일∼7월 2일
정진석, 특별기고 : 의식 계몽운동-정책비판 조선일보가 계승, 조선일보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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