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PC통신을 이용한지가 벌써 한 4년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PC통신을 사용하다보면 게시판이나
채팅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 관계가 '발전'(?)하여 개인적으로 전화를 주고받는
친구들이 한 두세명 정도 있답니다. 그 중에 한달전쯤엔가 알게 된 한 여학생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죠. 아직 한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늘 다정다감하고 따뜻하게 전화를 해주는 아이라서
제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저께인가, 밤늦게 이 아이가 제게 전화를 했어요. 평소 잘 웃던 목소리와는 달리 좀 우울해
보이더군요. 무슨 일 있냐고 물어도 대답도 잘 안하다가 대뜸 이렇게 묻더군요.
"오빠도 정말 얼굴보기 싫어하는 사람 있어요?"
갑자기 물으니까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또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다소 걱정스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있었지 물론. 근데 지금은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아니 없다기보단 없애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 게 맞을 것 같다. 근데 왜?"
"아뇨. 그냥요."
'누구한테 싫은 소리 들은 걸까?'하며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결국 울면서 말을 꺼내더군요.
"엄마가 저 꼴보기도 싫대요..."
어머니하고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제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갑자기 이런 얘길 하는 데엔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까전에 엄마랑 이모랑 전화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이모한테
그러는거에요... 정말 내가 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원래 나 안낳을려고 그랬다고..."
그제서야 형광등 기질이 발동하여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저는 무언가 해줄 말을 급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쉬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머님이 그런 얘기한 거 그렇게 신경쓰지마. 그리고 이미 어머니와 네가 사이가 안좋을 것 같으면
너도 그냥 어머니 신경쓰지 말고, 같은 집에서 지내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낫잖아."
"오빠가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순간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한 모녀간의 관계가 객관화될
수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에겐 그것이 역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거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그 애가 그러더군요.
"나는 정말... 엄마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더라도... 나를 이해해주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 아이는 '다음에 또 전화할께요' 하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나름대로 답답하기도 하고, 또 그 애가 어떻게 될 지 걱정스러워서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질 않더군요.
그 애는 무엇보다도 자기 어머니의 '원래 안낳을려고 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밉더라 하더라도, 그리고 당사자에게 대놓고 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그런 말은 할 줄
몰랐다는 게 그 아이의 생각이었겠죠. 저도 성격이 다소 예민한 편이라 '내가 만약 그 말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니, 저 역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격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시던 어머니께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엄마 정말 살면서 솔직히 나나 내 동생한테 '괜히 낳았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요?"
"...... 갑자기 왜?"
그래서 저는 어머니께 그 아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갑자기 말씀이
많아지시더군요.
"나도 네 이모한테 그런 얘기 한 적 있어. 예전에 니 동생이 속썩일때 정말 안 낳아야할 애
낳았다고 이야기 한 적 많아."
순간 괜히 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도 신경이 좀 예민해지긴 했지만, 일단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어머니 얘길 계속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정말 내가 힘들어서 한 이야기였어. 그 상황에선 정말 니 동생때문에 울면서 기도한
적도 많았고(저희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시거든요)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셨는지 모르겠다고..."
"근데, 지금 엄마는 그런 생각 전혀 안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땐 정말 내가 힘들어서 그랬다고 그랬잖아."
어머니 말씀의 요지는 그러니까, '안낳을려고 했다'라는 말이... 정말 그 의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게 아니고, 어머니 당신이 힘들어서 했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어머니의 상황이 워낙
힘들었기에(당시 어머니는 뇌종양을 앓고 계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굳이 그런
표현까지 써야 했을까' 하는 생각은 여전히 남더군요.
그래서 어머니와의 대화를 기초로 그 아이에게 위로의 편지(메일)를 썼습니다. 그 애가 그걸
읽었는지 아직 읽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다음 전화땐 그런 얘길 하지 않더군요. 다만 기분이 좀
풀렸냐는 물음에 '이젠 괜찮아요'하곤 짤막하게 대답하더군요. '괜찮다'는 말이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아졌다는 뜻인지, 아님 아예 체념해버렸다는 뜻인지는 묻질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제
개인적인 느낌으론 후자일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아이가 안고 있는 문제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심각한 것입니다. 어릴 때
어머님이 아프셨던 관계로 9살때까지 어머니 얼굴을 모르고 살았고, 또 중학교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그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와 갈등을 겪는 주 요인은,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을 어머니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죠.(이 아이는 작년에 한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보컬을 맡았었는데, 어머니의 반대로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모르고 자랐던 그
환경으로 어머니는 자신에게 정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그 아이는 자신의 오빠와 자기에
대한 어머니의 차별적 대우에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갈등을 불러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인 것으로 그 아이는 생각하고 있더군요.
저는 그 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답답했습니다. 그 애의 어머님이나 지금 우리의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 즉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방적인 제도교육 이외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공통된 사고방식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 답답함의 첫번째 이유구요.(그 애 이야길 들은
저희 어머니 왈, "니가 지금 그 애한테 해줄 말은 오늘부터라도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충고하는 거다") 아무리 자식이 밉다지만, 왜 그런 "안 낳을려고 했다"는 '최악의'
표현까지 써야 했을까 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분명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에게는 고마운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의 빛을 보게 하고, 자신이
성장하는데 정신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음에 틀림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은혜'를 담보로 자기 자식의 장래까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일정부분의 충고와 논의는 가능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벌써 고등학생이고, 이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기초적인 의무감을 갖고 있을 법한 나이의 자녀라면, 스스로의
인생관을 존중해주는 것 역시 부모의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올바른 양육권'을
거부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죠.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같은 정말 밀접한 관계에서는 서로간의 작은 말실수가 곧 되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자명합니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는 부모와 자녀간의 '예'를
강조하는 유교적 관념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이 의미는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말보다도, 그 애의 경우처럼 타인에게 발설된 말이 당사자 귀에 돌아갔을 때
당사자가 받는 충격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부모와 자녀 모두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자녀를 두고 계신 분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올바른
자녀사랑은 자녀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도와주는 것임을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도둑질처럼 타인과 사회에 해악을 끼칠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