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 유미리
감독 : 박철수
주연 : 양석일, 이사야마 히로꼬, 유애리, 마쯔다 이찌오, 나까시마 시노부, 김수진, 박영록
누구나 가슴에 한을 품고 산다. 그것을 굳이 '한'이라 표현하지
않아도, 가슴에 응어리진 무언가는 누구나 지닌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때론 그것을 망각한 채 살아가지만, 어느 한 순간 그것이 표출될 때 엄청난 삶의
고비와 긴장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지난 3년동안 잊고 살았던 가족의 존재가 다시 내게로
찾아왔다." (모토미)
이 가족 구성원이 갖고 있는 '한'은 막내 요코를 위한 영화촬영과
장녀 모토미의 생일을 맞이하여 20년만에 가족이 모두 함께 모인 자리에서 표출되어진다.
경제적으로 실패한 채 빠찡꼬를 전전하는 아버지, 딸 모토미를 강간한 사내를 볼모로
삼아 벼랑끝에서 생활하고 있는 어머니와 세 자녀들의 '한'은 예전 기억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되살아나게 된다.
가진 것 없는 가난한 한국인 재일교포 가족. 아버지는 빠찡꼬를
전전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어머니는 캬바레를 출입했던 가족. 집에선 매일같이 일어나는
부부싸움과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이 되풀이되었던 가족. 이 가족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당연히 되살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이 되살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대한 회상이 '영화촬영'이라는 계기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긴장관계를
조성하는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감독의 신호에 맞추어 카메라의
움직임에 맞추어 이들 가족은 자신들의 과거사를 들추어내지만 그것은 곧 '영화'에서
'현실'로 전화되는, 즉 영화 흐름의 주도권이 영화내의 감독에서 그 가족들로 바뀌어지는
반복적인 구성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약간의 혼돈을 느꼈는데,
'배우'들의 대사, 그리고 작품 화면속에서의 카메라는 도무지 어디서 어디까지가
작품속의 영화촬영인지, 또 그것이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작
영화속의 감독은 그 '주도권'이 가족으로 넘어가는 것을 오히려 바라고 있는 것과
반해, 그 가족들은 도리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려
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 긴장관계는 온천장 캠프에서 나눈 아버지와 감독의 대화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자신의 의도로 영화가 끝나기를 바라므로, 이 영화가 해피엔딩을
맺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는 척 하면서도 촬영
스탭에게 '찍고 있지?'라는 말을 건넨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부부는 서로의 내면적 갈등을
주고받으며 화해의 단계까지 이어져나간다. 이 화해단계의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을 드러내게 된다. 가족이 다시 합쳐지는 것을 찬성하는
아버지, 어머니, 장남(그는 모토미만 좋다면 자신도 좋다고 한다)이 그 첫 번째 입장이며,
현실과는 관계없이 '영화속 화해'에만 찬성하는 요코가 두 번째 입장, 그리고 가족이
합쳐지는 것을 반대하는 모토미가 마지막 입장이다. 더 세분해서 나눈다면, 물론
가족 개개인의 입장은 훨씬 더 세분화된다. 아버지는 헤어진 동안 가족들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존중받는다는 전제하에서의 가족의 합일을
원하고,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집을 담보로 하는 전제하의 합일을 원한다. 요코 역시
영화의 성공과 흥행을 염두에 둔 가족간의 화해에만 집중하고 있다. 겉으로는 하나로
의견이 모아지는 듯 하지만, 결국 이들의 입장은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리는 결국 좁혀지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을 맺고 만다.
그렇다면 이 거리는 왜 좁혀지지 못했는가. 아마도 그것은,
그들간의 거리가 단순히 '영화촬영'을 매개로 한 일순간의 모임과 화해에 대한 동의로서는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들에겐 '우리는 가족'이라는
개념만 존재하고 있을 뿐, 가족이 갖고 있는 유대감과 자부심이란 것은 전혀 남아있질
않기 때문이다. 얼마전 권희로씨의 내한으로 우리 사회에 더욱 더 자세히 조명되기도
했지만, 일본내 '조센징'의 그 비참했던 삶은 이들 가족의 내면적 유대를 가로막았던
커다란 요인이지 않았을까 한다.(아쉽게도 영화 속엔 이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되어있지
않다. 몇 가지 유추가 가능한 장면은 요코가 감독에게 모토미의 자살동기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그 원인 중 하나가 학교 내에서의 '이지메'라는 사실을 밝혔던 것, 그리고
어머니가 욕을 할 때 '조선말'을 썼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민족차별의 아픔은 가족 구성원의 해체를 불러일으켰으며,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로 합의될 수 없는 커다란 '장애'와 '한'을 각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깊이 새겼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영화는 아버지의 실종과, 완성된 영화를 가족들이 함께
관람하는 것(물론 이것까지도 감독과 스탭들은 촬영을 하고 있었다.)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처음 영화를 찍을 때부터 요코와 더불어 가장 촬영에 적극적이었던
어머니는 결국 '이젠 찍지마!'라는 울음섞인 항의를 토하며 극적인 반전을 맺는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반전. 아버지를 가장 증오했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는 과정을
2부로 계속 찍자는 요코의 제안을 크게 나무라며, 아무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그렇다. 영화촬영 내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다투며 때론
몸싸움까지 벌였지만, 그 부부의 '한'이라는 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었다. 대립된
것처럼 보였던 두 명제가 결국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 속에서 나는 그들의 진정한
내면적 아픔을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의 한은 결코 개인적, 가족적인 특수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내 한국인이 겪고 있던 아픔과 한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들의
눈물과 한을 이해하지 못하며, 어느 가족이나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인 감독,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잔인한' 일본인
스탭들의 모습과 '조센징' 가족의 눈물은 너무나 선명하게 대비된다.
이들의 아픔을 내가 이해했다면 너무 섣부른 판단일까? 영화가 끝난 지금도 두 눈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어머니의 그 많은 눈물은 나의 그러한 '섣부른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