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한글로 번역하기
오후에 컴퓨터를 토닥토닥거리며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사장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자네 이거 번역좀 해봐~"
마감날짜 얼마 안남았는데 웬 번역...? 궁시렁궁시렁 대고 있던 중, 얼핏 보니 이건 영어가 아니고 한글이지 않은가?
"이거 한글인데요..."
"번역하라면 해! 왜 그렇게 말이 많아!"
"......(깨갱~)"
별 걸 갖고 다 트집이다 싶어서 그냥 가져왔다. '마린 디자인 연구소'라는 상품디자인 개발업체에서 우리 회사에 우편으로 보낸 포스터였다. 영어와 한자가 대문짝만하게 섞여있는 중앙부 아래에는 한글로 된 부분이 있었다. 정말 한글이었다. 그런데 정말 번역해야 했다...
제목
: POSITIONING OF PACKAGE IMAGE
부제 : 상품의 이미지창출은 브랜드 중심이어야 합니다.
내용이 멋.지.다... 함 보시라.
<상품의 상징적인 성격을 표출함에 있어서 패키지디자인의 역할은 브랜드 중심으로 머천다이징을 해석한 비주얼 표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패키지디자인은 써바이벌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기업의 전략이자 마케팅의 전술이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비주얼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해서 브랜드 중심으로 태어난 패키지디자인을 볼 때 총체적인 느낌은 대체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인상의 안성맞춤! 상품의 좋은 인상을 개성있게 코디하는 디자인연구소 - 마린 디자인 인스티튜트>
마지막 '마린 디자인 인스티튜트' 부분에 정말 숨넘어가는줄 알았다. 이 글 처음볼 땐 황당하다가 슬슬 읽어나가면서 분노가 치솟다가 후반부에 가서는 웃겨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글을 다 읽고 나니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사장 할아버지가 번역하라고 하셨으니 번역을 해 드려야지... 번역문은 대충 이렇게 만들어서 올렸다. 한번 위 글과 비교하면서 읽어보시라.
<상품의 상징적인 성격을 나타낼 때에는 상표가 판매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상표 중심의 디자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상품의 디자인은 경쟁력있는 상표를 만들기 위한 기업의 전략이자 판매의 전술이요 소비자와의 의사소통을 위한 시각적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하여 상표 중심으로 태어난 상품의 디자인을 볼 때 우리는 전반적으로 좋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좋은 인상의 안성맞춤! 상품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개성있게 맞춰내는 디자인 연구소 - 마린 디자인 연구소 >
물론 내 '번역문'(?)도 엉성하긴 마찬가지다. 워낙 원문이 개판이었던지라 도저히 직역도 불가능, 의역에 의존해야 했다. 차라리 영어로 써놨으면 번역이라도 똑바로 하지...
'대체 이 넘들 누구야?'하며 화를 냈다가 나중엔 점점 '분노'를 삭였다. 이 사람들도 뭐 그러고 싶어서 그딴식으로 되지도 않는 영어 섞어가면서 썼겠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삭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론 저 광고문 내건 회사가 참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이 문제는 그 사람 개인의 언어수준이나 양심에 관련된 것으로 한정해선 안될 성격의 것이다. 이 광고문을 내건 회사는 '디자인 회사'다. 말 그대로 창의적이고 전문적인 생각을 요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길을 지나다가 저런 광고를 본 사람들은 그냥 훑어보게 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 광고에 적힌 문장의 해석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 전체가 주는 이미지에 어떤 '영감'을 받게 된다. 글을 제대로 읽는게 아니라 훑어보게 되다보니 문장의 논리성보다는 단어 하나 하나에 집중한다. 위 문장에서의 예를 들면 '브랜드','패키지디자인', '머천다이징', '비주얼', '마케팅', '인스티튜트' 등등의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들에 집중한다. 그 '외국어'를 본 사람들은 이 회사가 무언가 전문적이고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마련이다.
이건 다시 우리 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환원된다. 외국어 좀 할 줄 알면 그 사람자체를 다르게 보는 그 사대주의적 편견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깔려있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멀리 볼 것 없다. 한글도 못읽는 어린아이에게 성조기와 미국인들로 가득찬 하늘을 보여주는 영어교재테잎들, 세계화 흐름에 발맞춘답시고 입사시험에 논술고사대신 토익시험 점수에 몇 배나 더 큰 비중을 두는 대기업들... 이런 사회에서 저런 광고문이 나도는 것은 오히려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 돼버렸다.
나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언어'라는 주장이 맞는지 틀린지 잘 모른다. 그리고 필요할 땐 외래어 또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내가 우려하는 바는 바로 '언어로 인한 계급적 분화'이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 때 보수기득권 세력들이 이에 반발하였던 것과 같은 현상이 오늘날, 20세기 막판의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한글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보다 영어 좀 할 줄 아는 사람이 대접받는게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현상이 위에서 밝힌 광고회사의 경우처럼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분야의 사람들에 의해 계속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끔 학술지를 읽다보면 잘 모르는 외국어 단어 하나에 그 단락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여러번 경험했다. 그들 사이에선 '그들 나름대로의 언어'로서 통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이들 계급의 장벽은 바로 '언어'이다. 그 '언어'를 수용할 능력이 되는 사람만 그들 세계에 진입하고 나머지는 그 앞에서 발길을 돌린다.
그 계급에 새로이 편입된 사람들은 기득권의 안녕과 유지를 위해 계속 또 다른 그들만의 언어를 만들어낸다. 이게 바로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 전문가 집단의 폐쇄적인 현상 중 하나이다. 이 점에선 한자병용을 주장하는 보수기득권 세력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경험을 느낀 적이 있겠지만 내가 영어공부하면서 정말 절실하게 느낀 점은 '한글을 제대로 알아야 영어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글도 똑바로 구사하지 못하면서 영어단어 몇 개를 섞어보려고 하니깐 문법에도 맞지 않은 문장이 생겨난다. 위 문장의 글을 다시 인용하면서 글을 맺는다.
"그렇게해서 브랜드 중심으로 태어난 패키지디자인을 볼 때 총체적인 느낌은 대체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