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순자 기자회견'과 조선일보의 '안보상업주의'
이야기 하나.
예전에 김만철씨 일가가 청진항인가 어디에선가 배를 타고 '피남'왔을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듯 하다. 그 때 언론보도는 정말 대단했었다. 한 며칠동안 그들 가족은 매스컴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고, 그들에 대한 대접 역시 화려했다. 그들이 공항에서 가진 기자회견은 전 방송사가 자체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실황중계했다.
그런데 지금 김만철씨의 근황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도 김만철씨가 했던 말들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얼마나 될까?
이야기 둘.
93년도인가 김정일의 전처였던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씨가 귀순한 뒤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씨와 통화한 녹음내용을 모 월간지(월간조선으로 기억됨)가 공개했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나서 한참동안 언론에서 떠들어댔다. 그런데 이듬해 94년 2월에 이한영씨는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안기부는 그 범인이 북한공작원이라고 밝혔다. 그 테이프 공개로 인해 '이한영'이란 이름과 얼굴은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그가 당시 일산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한마디로 모든 게 다 알려진 셈이다. 그리고, 언론에 의해 김정일의 '신변잡기'적인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 만약 그 때 이한영씨의 통화내용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이한영씨는 살해되었을까?
본론
나는 여기서 당시 이한영씨에 관한 언론의 보도태도를 비판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이한영씨는 무얼 믿었는지 몰라도 인터뷰에 적극적이었고, 자신의 얼굴까지 언론에 공개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탈북자의 신변이 그렇게 공개적으로 다뤄진다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신변의 위협으로 작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얼굴을 쓸데없이 모자이크 처리하나?
그런데 이제 조선일보가 그걸 떳떳이 공개하자고 나섰다. 12월 3일자 조선일보사설의 제목은 <귀순자 會見 이젠 없앴나?>다. 이 사설의 요지는 제목 그대로 '귀순자 회견하자'는 거다.
< 지금처럼 탈북귀순자가 얼마나 넘어왔는지, 왔으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도 없고, 그리고 이들이 우리 국민들을 상대로 하고 싶은 말도 많을 터 인데 그같은 기회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
그같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다. 원점에서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탈북자 기자회견이 탈북자의 자청에 의해서 이루어졌나? 안기부의 '주선'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일보가 같은 지면에서 밝힌 것처럼, 당시의 기자회견은 정권의 '안보'에 요긴하게 써먹는 용도로서 자의적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탈북자들 대부분은 황장엽처럼(?) '북한 정권의 실상을 알리러' 온 것도 아니고, 먹고 살기 힘들어서 남한을 택한 것뿐이다. 또 이들은 가족들이 단체로 온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귀순자들은 가족과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떠나온 사람들일 게다. 따라서 북한에 남은 가족들의 신변문제 역시 여기서 반드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다.
귀순자들이 정 자청을 해서 귀순자 회견을 열어달라고 요청한다면, 그 때선 막을 이유가 없다. 귀순자 회견 열면 그 때 조선일보가 가서 취재하고 '취재기'를 조선일보에 실으면 그만일 테다. 귀순자가 자신과 가족의 신변의 위험성을 내비치면 조선일보가 얼굴하고 이름 공개하지 않은 채로 개인적으로 취재해서 싫으면 될 일이다. 자기가 하면 될 일 갖고 이걸 왜 정부가 회견 안시키냐고 사설까지 동원해서 트집잡는 건 귀순자 회견을 강제로 열자는 의도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조선일보는 외국사람 몇 명 불러다가 '북한인권세미나'를 거창하게 열고 있다. 북한 사람들의 인권에 관한 세미나를 연다는 사람들이 귀순자 회견을 강제로 열자고 한다. 그래서 신상이 공개된 탈북자는 제2의 이한영이 될 지 모르고, 그들의 가족은 북한정권에 의해 고초를 겪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선일보에게 묻고 싶다. 귀순자와 귀순자 가족의 인권은 인권이 아닌가?
조선일보가 귀순자 기자회견을 강제로 열자는 의도는 명확하다. 그동안 조선일보는 수십년간 귀순자의 기자회견 기사로 한탕하고, 그리고 나서 귀순자 가족들이 고초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로 또 한탕하고, 그 다음에 이한영씨 같은 경우가 생기면 그걸로 또 한탕 해먹는 식의 모습을 계속 유지해왔다. 그리고 이 악순환의 고리는 지금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들어서 다소간의 유화적인 대북정책으로 남북간의 긴장상태가 다소 와해된 상태이며, 예전과 같이 의례적으로 강제되었던 탈북자 기자회견의 모습도 이젠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니 조선일보로서는 그런 정부의 대북정책 하나 하나에 시비를 걸며 남북간의 긴장을 되려 고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왜 이러는 걸까? 이게 바로 흔히들 말하는 조선일보의 '안보상업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