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정신적 고문'을 하지 말라.

 

조선일보에게 칭찬해주고 싶은 걸 굳이 꼽으라면 나는 그들의 상술과 맞든 틀리든 그걸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그들만의 엄청난 '포장술'을 들고 싶다. 이사를 와서 조선일보 본다는 소리도 안했는데, 어느날 아침에 눈을 뜨고 문 밖을 열어보니, 조선일보 한 부와 일제 믹서기 한 대가 배달(?)되어있었다. 이왕 갖다놓을 거면 국산품을 갖다놓든가, 아님 아예 '민족지'라는 주장을 이제부터 하지 말든가... (서..설마 일본인의 선조가 모...몽고족...?)

이 믹서기를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결국 신문대금 받으러 올 때 점잖게 돌려주기로 가족들과 합의를 봤다. 조선일보는 '연구대상'으로 계속 봐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계속 보자고 했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는데, 조선일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 끼워넣기 상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신문별, 지역별로 전시 및 바자회를 열고, 그 수익금을 좋은 일에 쓰는 건 어떨까 하는 거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들의 논리적 포장술에 관한 얘기다. 조선일보가 '똑똑하다'는 건 예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 똑똑하지 않고서야 그 험난했던 한국현대사를 쭈욱 거쳐오면서 조선일보가 이 정도 지위에까지 올라설 수 있었을까?

문제는 그 '똑똑함'을 어떻게 써먹느냐다. 머리 좋은 것만 따지면야 신창원도 그야말로 천재급이었고, 십수년간 골방에 처박혀 혼자서 컴퓨터서적을 썼다는 이근안도 마찬가지다. '똑똑함'을 좋게 써먹어야지, 진실을 회피하고 호도하는 데 써먹는 건 정말 돼먹지 못한 짓이다.

11월 13일자 조선일보 사설의 제목은 '정권 바뀌면 재수사?'이다. 서경원씨가 북한에서 받은 자금 중 1만달러를 DJ에게 주었다는 당시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임을 밝혔고, 이에 대해 검찰이 재수사의사를 밝힌 것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다. 내가 방금 '비판'이라고 했나...? 내용을 읽어보면 이는 비판도 아니고, 좋게 봐주면 '어린애 투정'이라 할 만한 것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이 사설의 제목은 '정권 바뀌어도 재수사 하지마라'가 아니다. 비꼬는 식의 의문문이다. 재수사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조금은 작용을 했는지, 차마 그 소리는 할 용기가 안나니깐 고작 한다는 말이 '재수사?'다. 이게 어린애 칭얼대는 거하고 뭐가 다르냔 말이다.

조선일보 하는 소리 좀 한번 들어보자.

< 만약 고문행위가 입증될 경우엔 '1만달러 운운'은 '조작'이 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선 간첩, 회합통신, 잠입탈출 등이 적용됐던 '서경원 밀입북' 사건 전체가 뒤흔들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때의 '안기부'등 당시의 수사팀이 오히려 문책당할 수 있고, 지금까지의 공안기준 자체가 전면적으로 붕괴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우리 사회의 그 동안의 준거(準據) 전체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강조는 류석원 처리)

요즘 TEPS가 영 호응을 못받으니깐 이젠 며칠 안남은 수능을 겨냥하는 건가...? 자, 수험생 여러분. 위 글에 어울리는 한자성어는 다음 중 뭐게요?

① 地捺發光

② 開小理

③ 罰地居利

④ 改骨改骨

⑤ 針小棒大

제가 볼 땐 전부 정답인 것 같은데... 그래도 '바른생활 수험생' 여러분은 5번을 찍어야 수능에서 맞는 걸로 쳐주겠죠...?

조선일보는 왜이리 호들갑을 떨까? <고문행위 입증 → 사회준거 타격>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휘황찬란한 논리전개는 정말 눈물나게 감동적이다. 머리 쓴 흔적이 보이는 정말 눈물나게 감동적인 구절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사회준거에 타격을 줄 우려가 있으니 그간의 고문행위에 대한 수사를 하지 말자는 거다. 근데 계속 읽다 보면 또 그게 아니다. 자신이 방금 한 말을 바로 뒤집어버린다. 같이 장난을 치자는 건가?

< 우리는 비단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의 실체적 진실규명이라는 일반원칙에는 아무런 이견(異見)이 없다... 고문행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가리고, 있었다면 그것이 그때의 수사와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 고문으로 인한 진실훼손 부분을 적정하게 바로잡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보라. 언제 그랬냐는 듯 입 딱 씻고, 재수사해야 한단다. 그럼 도대체 조선일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뭘까?

< 그러나 그 경우에도 모든 것은 순수하고도 철저한 법리(法理)에만 의거해 진행돼야지, 추호라도 정치적인 주변정세에 이용당하거나 영향받는 점이 있어서는 안된다. 더욱이나 10년 가까이 지난 옛 사건의 수사과정에 고문행위가 있었는지를 무슨 방법으로 판별할 수 있을지, 그리고 설령 있었더라도 그것을 관련자들의 진술에만 의존해서 수사할 경우 그것이 과연 증거능력을 가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

여태까지의 논리를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재수사 하지마." → "하고 싶음 해보든가." → "근데, 해도 안될껄?">

정리해놓고 나니깐 다시 명확해진다. 조선일보의 입장은 분명 '재수사 반대'다. 그런데, 그럼 재수사 반대 논리만 펼치면 되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면서 독자들을 귀찮게 하는 걸까? 그건 자신도 뒤가 켕기는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고문수사가 한창일 전두환, 노태우 정권 당시 조선일보는 군사독재정권을 옹호하며, 민주인사 탄압에 가장 열렬히 앞장서온 장본인이다. 그런 정권의 뒤를 파내겠다니깐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까봐 웬지 껄끄럽기만 한 거다. 그래서 반대논리를 펴긴 펴야겠는데, 웬지 양심에 걸리니깐 애꿎은 '법리'를 내세우고, '정치적인 주변정세'를 앞세우는 거다.

근데, 정말 조선일보는 '법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법에 따라 순리대로 처리하는 게 법리 아닌가?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면, 고문여부를 철저하게 조사해서 조작된 내용이 있다면 그것이 거짓임을 밝혀내는 게 '법리' 아닌가? 그것이 '법리'와 배치된다면, 결국 조선일보의 논리는 '법이 고문을 보장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

'정치적인 주변정세'라... 정말 헛소리한다. 이근안이 잡히고 정형근이 한나라당에서 설쳐대기 훨씬 이전부터 민가협 아버님, 어머님을 비롯한 수많은 민중들은 고문으로 인한 피해를 고발하고, 그 사실을 알려내느라 노력해왔다. 경찰이 이근안을 '안'잡고, 조선일보가 그를 잊어버리고 있던 그 때, 민가협 회원들은 그를 잡기 위해 11년 동안이나 안간힘을 써왔다. 그런데 이제와서 뭐라고? '정치적 주변정세에 이용당하고 영향받아서는 안된다'고?

10년이 지났다고 고문여부를 판별할 수 없다는 건 조선일보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조선일보의 그런 논리는 '이근안을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와 마찬가지이다. 이근안은 수배받은지만 10년이 넘은 사람이다. 조선일보의 논리대로 한다면, 이미 50여년이 다 되어가는 '노근리 사건' 역시 처벌할 수 있는 조건은 아무것도 성립되지 못한다.

조선일보가 제기하는 '시효의 문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와 맞딱드려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고 정권을 잡아서 수십년간 우리사회를 숨죽이게 만들었던 박정희는 오늘날 조선일보로부터 '근대화 혁명가'라는 영웅칭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전기고문과 날개꺾기 등의 반인륜적인 수단을 동원했던 당시의 고문사건 역시 '빨갱이 사냥'의 일환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조선일보의 '독재정권 끌어안기'의 근거인 것이다.

고문은 절대 있어서는 안될 행위다. 따라서 고문이 있었다면 이를 밝혀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사회 준거 전체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고문 행위를 입증하면 우리사회 준거 전체가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는 새빨간 거짓말만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기에 우리는 친일파를 제대로 숙청해내지 못했고, 박정희를 우리의 머리 위에 둘 수 밖에 없었던, '우리사회 준거 전체가 심대한 타격을 입'었던 뼈아픈 경험을 이미 갖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 진다. 덧붙여 나는 더 이상 조선일보의 '정신적 고문'도 받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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